2025.11.18.
은혜는 언제나
먼저 옵니다.
누가복음 15:11–24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탕자의 비유는 단순한 회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선행적 은혜를 드러내는 깊은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무너졌지만, 아버지는 그를 단 한 번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아버지가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갔다고 말합니다. 이는 아버지가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순간보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오시고 계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회개보다 더 빠르고, 우리의 결심보다 더 넓은 은혜가 먼저 다가옵니다. 이 은혜는 조건이 아니라 관계이며, 보상이 아니라 품어주심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삶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시 시작하는 자에게 은혜의 옷을 입히고, 잃어버린 자를 잔치의 자리로 데려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짧은 요약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돌아오기도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습니다. 탕자를 달려가 맞이한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먼저 우리에게 오십니다.
관련 본문
시편 103:8–12
이사야 30:18
요한복음 1:16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단어 설명
1. 라훔(רַחוּם / rahum)
“긍휼히 여기다, 깊은 자비”라는 뜻. 하나님 성품을 묘사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
2. 헤세드(חֶסֶד / hesed)
“언약적 사랑, 끊어지지 않는 자비”를 의미. 조건적이지 않고 지속되는 사랑.
3. 프로드라마오(προδραμόω / prodramaō)
“앞서 달려가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달려갔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
인간이 하나님께 가는 것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더 빨리 달려오심을 강조.
생각할 주제
하나님은 나보다 먼저 움직이시는가?
내가 돌아가기 두려워하는 ‘아버지의 집’은 무엇인가?
은혜가 선행한다는 사실이 나의 일상과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짧은 기도
주님, 먼저 나를 향해 달려오시는 은혜를 기억합니다.
돌아올 용기조차 없을 때에도 나를 기다리시는 사랑을 믿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사랑을 닮아 다른 이들에게도 은혜를 흘려보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아들의 실패와 회복을 그리는 서술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는 은혜의 깊은 이야기입니다. 오랫동안 ‘탕자의 비유’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비유’, 즉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한 예수님의 의도적인 장면 전개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합니다. 이 요구는 당시 문화에서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유산을 달라는 것은 사실상 “나는 아버지를 죽은 사람으로 여깁니다”라는 선언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사랑은 침묵으로 상대의 선택을 허락하는 순간을 포함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무모한 선택을 막지 않으시지만, 그 선택을 지켜보며 기다리는 마음을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아들은 결국 먼 나라로 떠나 모든 것을 잃고 완전히 무너집니다. 유대인에게 가장 부정하고 비참한 일로 여겨지는 돼지 치는 일을 하며, 삶의 최저점까지 내려갑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스스로 길을 찾고자 할 때 결국 도달하게 되는 곳이 어떤 모습인지, 아들의 추락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먼 나라’에서의 삶은 처음에는 자유롭게 보이지만 결국 공허와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아들은 결국 먼 나라로 떠나 모든 것을 탕진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돼지 치는 일은 가장 비참한 직업 중 하나였습니다. 율법적으로도 부정한 동물인 돼지를 돌보는 일은 종교적·사회적 수치였습니다. 아들은 이제 더 이상 낮아질 곳도 없는 완전한 밑바닥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추락은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은혜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완전히 무너진 곳에서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처음에는 진정한 회개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선택에 가까웠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일꾼이 얼마나 많은가”라는 말은 아들의 마음이 아직 온전히 변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동기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돌아가는 선택 자체가 은혜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첫 걸음은 언제나 어설프고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도 은혜는 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가 완벽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흐트러지고 엉킨 마음 그대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작은 움직임을 기쁨으로 받아주십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마음속 어딘가에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억은 은혜의 흔적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남겨두신 표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작은 흔적 하나를 남겨두시고, 그 흔적을 통해 다시 부르십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가 작동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마음속 어딘가에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억은 은혜의 흔적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남겨두신 표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작은 흔적 하나를 남겨두시고, 그 흔적을 통해 다시 부르십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가 작동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절정에 이릅니다.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을 봅니다. 이는 아버지가 매일같이 같은 자리를 바라보며 아들이 돌아올 길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향해 달려갑니다. 헬라어 ‘프로드라마오’는 단순히 빠르게 걸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체면을 내려놓고 급히 달려갔다는 강렬한 행동을 나타냅니다. 당시 성인 남성이, 그것도 어른이 달린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체면보다 아들을 택합니다. 그는 아들의 잘못을 한 번도 묻지 않고, 돌아온다는 사실 자체를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회개의 문장을 꺼내지도 못한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오라 하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준비합니다. 아들은 ‘종의 자리’를 요청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자격을 묻지 않고, 존재를 회복시키는 힘입니다. 아들은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너는 여전히 내 아들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이 바로 복음입니다.
아버지가 준비한 잔치는 단순한 축하 자리가 아니라 공동체 앞에 아들의 회복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은혜는 개인적 위로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 속의 자리까지 회복시키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밀하게만 회복시키지 않으시고, 잃어버린 자를 공동체의 기쁨 가운데 다시 세우십니다.
이 비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잘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이 우리가 변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우리의 결심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먼 나라’와 같은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 실패, 관계의 단절, 자책과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돌아가기 훨씬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 마음 가까이 다가오셔서 다시 시작할 길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결국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포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비로우시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용서를 준비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기 전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돌아갑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미 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따라 우리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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